April 16, 2016

"나는 92세입니다. 이제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최기호 가야대학 객원교수
 
나는 1923년생입니다. 이제 한국을 위해도, 일본을 위해도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상당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생명의 위험도 각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사명인 것입니다.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평양이나 토쿄에 갔습니다. 그 당시의 한국인은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입니다. 극장에 가면 영화의 전에 전쟁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뉴기니에서 일본이 이긴 영상이 흐르자, 박수와 만세의 폭풍우입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해, 토쿄에서도 갔습니다만, 일본인은 냉정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전원이 미친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보통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친일파라고 하는 말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사용할 수 없는 말을 사용해, 선조까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일본인이라고 하는 인상을, 필사적으로 지우기 위해 반일을 지도자는 꼬드김은 왔습니다.

일본군의 승리를 축하하는 한국인 (1941년 서울)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육을 비교하면, 일본이 10%왜곡이라고 하면, 한국은 90%왜곡입니다. 조선말기의 비정상인 정치 부패를 가르치지 않고, 일본이 관여하지 않으면 독립을 할 수 있던 것처럼 쓰여져 있습니다.

한일합방에 의해 ‘교육’ ‘의료’ ‘공업’ ‘사회 인프라’ 가 정비되었습니다.근대국가의 기초가 쌓아 올려진 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실적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의 산물이다!’라고 규탄하는 한국에는 기가 막힙니다. 더욱 ‘일제가 민족 산업을 정체시켰다!’라고 하는 주장에는 코멘트하는 기분도 없어집니다.

민족 산업을 죽인 것은, 조선왕조입니다. 근대화를 주장하는 선진적인 사상가는 반역자로서 친족까지도 처형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일제의 학대! 성 노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만,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말기는 지옥이었습니다. 그것은 대한제국 시대가 되어도 같았습니다. 1904년 , 일본은 조선의 참상을 구하기 때문에, 재정 지원을 결단합니다. 예를 들면 1907년도 , 조선왕조의 세입은 748만엔이었지만 , 세출은 3000만엔 이상이었습니다. 그 차액은 일본이 부담하고 있습니다. 1908년에는 더욱 증가해 , 3100만엔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현재 92세의 노인의 절규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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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본통치시대의 교육도 받았어요. 일본은 교육에 있어서도 차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

전 한국 공군대령 최삼연씨
 
원래 식민지라는 것은 15세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근현대사라는 것은 인류에 있어서 식민지시대라고도 할 수 있어요. 세계는 가는 곳 마다 식민지 투성이었어요. 아프리카 등은 식민지시대가 끝나고도 빈곤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식민지로부터 근대적인 경제발전을 수행한 곳은 어디인가요? 한국과 대만입니다. 모두 일본의 식민지였던 곳입니다. 그 외에도 홍콩과 싱가폴이 있지만, 여기는 영국의 소위 천령(天領)이었습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서 대표적이지만, 인프라가 정비되어있지 않고, 좀처럼 경제발전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인도는 경제발전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레도 일인당 GDP는 890달러, 문자해독률은 64%에 불과합니다.

한국과 대만은 일본통치시대에 인프라가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 철도, 수도, 전기 등의 설비는 일본 국내와 큰 차가 없었어요. 이것은 다른 외국의 식민지 경영과 아주 다른 점입니다. 다른 외국은 식민지로부터는 일방적으로 착취만 할 뿐이었어요. 일본은 국내의 세금을 식민지의 인프라 정비에 투입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민의 생활수준에도 본토와 그다지 차이가 없었어요.

저는 일본통치시대의 교육도 받았어요. 당시 일본 국내에서 행하여지고 있었던 학교교육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또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는조선인의 입학을 인정하고 있었어요. 당시의 다른 외국에서는 자국의 육군사관학교에 식민지인의 입학을 인정하지는 않았어요. 즉 일본은 교육에 있어서도 차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다른 외국은 본국과 식민지를 명확히 차별하고 있었어요. 식민지란 착취의 대상으로서 경영하는 것이었고, 차별당하여도 당연했습니다. 일본은 차별을 하지 않도록 병합한 것이고, 소위 다른 외국의 식민지지배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식민지지배를 받은 측에서는 원한과 증오가 있지만, 역으로 종주국에 존경의 마음을 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도인이 영국문화에 존경의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대만과 한국에서도 “그 시대는 열쇠를 잠그지도 않고 잠을 잘수 있었다.”고 하는 연배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그런 시대를 모르기 때문에, 증오의 감정만이 앞서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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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김에 애국심이 지나쳤나?"


세계일보 | 입력 2013.09.12

일제 식민지배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술에 취해 90대 노인을 때려 숨지게 한 30대 남성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지난 5월 황모(38)씨는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에서 박모(95)씨와 시비가 붙었다. 황씨는 당시 술을 거하게 마신 상태였는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한 것은 잘한 것'이라는 내용의 박씨 말을 듣고는 화를 참지 못했다. 이윽고 황씨는 박씨를 걷어차고 박씨가 몸을 지탱하던 80㎝ 짜리 지팡이를 뺏어 들어 그의 머리를 수차례 때렸다.

박씨는 곧바로 병원에 실려갔다. 뇌출혈에 두개골을 심하게 다쳐 전치 8주의 진단을 받았다. 황씨는 경찰 조사를 받은 뒤 박씨를 흉기로 때려 다치게 한 혐의(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로 기소됐다.

법원은 처음엔 황씨 혐의를 단순한 상해 사건으로 분류해 단독재판부에 배당했다. 그런데 재판 도중 입원치료를 받던 박씨가 숨지면서 일이 커졌다.

검찰은 황씨의 폭행이 박씨의 사망 원인이라며 상해치사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했다. 황씨 재판도 3명의 판사가 심리하는 합의재판부로 넘겨졌다.

황씨는 법정에서 '술에 너무 취해 심신미약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중형을 피하진 못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부장판사 김용관)는 황씨 혐의를 전부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고 10일 밝혔다.

재판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고령인 박씨를 폭행해 사망하게 했다"며 "그럼에도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지하게 사과하거나 피해 회복 노력을 하지 않아 엄벌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이어 "황씨가 만취 상태라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범행 당시 피해자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정도의 사물 변별능력은 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912144207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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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45년 한국의 인구추이"

일본 통치가 시작된 191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는 13,128,780명이었다. 일본 통치가 끝나기 전의 해(1944년)에는 25,120,174명이었다. 평균 수명은 20 대부터 40 대까지 늘어나고 1인당 국민소득은 5배가 되었다.

 
 

"병합은 한국 국민이 바랐다"

좌측:‘일진회’ 회장 이용구가 보낸 한일병합을 요구하기 위한 전보.
우측:병합 직전의 국내 정치 세력. 회원수를 보면 일진회가 압도적 다수파.
★‘강제 병합설’은 새빨간 거짓말.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했다 라는 새빨간 거짓말"

2차대전후 일본통치시대의 훌륭함을 잘 아는 조선인들은
•신탁 절대 반대
•우리 비원, 모국 일본에의 즉시 복귀
등을 호소하기 위한 시위를 잇따라 행했다.



"조선총독부는 교육으로 한글을 보급시켰다"

조선총독부는 일본통치시대에 약 5000교도 학교를 세우고 조선인에게 의무교육을 주고 한글 교과서를 작성하고 한글을 보급시켰다.



"일본통치시대의 교육"

•상단: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 반도에서 최초의 대학.
•하단:경성여자사범학교. 조선시대에 여성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식민지 지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은 대학교육까지 줬다.

 
 
"병합 통치의 훌륭함을 검증; 남대문 대로"

•상단:1897년;
★허술한 초가집 밖에 없다. 열악한 위생 환경.
•하단:일본 통치중;
★모든 인프라가 정비됐다. 위생과 생활환경이 극적으로 개선되고 근대화됐다.

 

"일본통치시대 검증(남대문로)"

•위:1880년대-굶주림과 빈곤에 시달렸던 조선 사람들
★일본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조선을 재건했다
•밑:1936년-명백히 일본이 근대화시켜서 발전시켰다.
★식민지가 아니었다



"병합 통치에 의해 극적으로 개선된 생활"

•위-컬러 보정:조선 시대. 아주 비위생적인 환경. 빈곤 그것이다.
•밑:1937년 조선 호텔내 선룸. 좌측 여성은 무도가 崔承喜.
★일본 덕분에 극적으로 개선됐다.

 
 
"일제강점기 서울 vs 구한말 서울"

http://www.ilbe.com/7623596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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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의 뜨거운 만화경' (천정환, 2010)  https://goo.gl/KmwffG
내용 중



¶1938년~1943년, 조선인 청년의 日本軍 자원입대 현황   

1938년
400명 모집에 2,900여명 지원(경쟁율 7.2 대 1)

1939년
600명 모집에 12,300여명 지원(20.5 대 1)

1940년
3000명 모집에 84,400여명 지원(28.1 대 1)

1941년
3000명 모집에 144,700여명 지원(48.2 대 1)

1942년
4500명 모집에 254,300여명 지원(56.5 대 1)

1943년
5330명 모집에 303,400여명 지원(56.9 대 1)

☞1940년(경쟁율 28.1 대 1)의 경우, 지원했으나 탈락하
여 입대를 못하게 된 강원도 횡성군의 한 청년(이창만)이,
이를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건 발생.  


榮譽(영예)의 志願兵應募(지원병응모) 79,600명 [동아일보 1940년 2월 13일 석간]
 영예의 지원병(志願兵)으로서 국민으로서의 충성을 다하겟다고병문에 운집하는 자가 날로 늘어간다함은 루보하는 바이나 제3차 조선인육군특별지원자 모집에지난十(십)일 마금날까지에 응모한자가전조선을 통하야 79,602명을 돌파하엿다. 그중에서 적격자(適格者)가 36,771명으로 3,000명 모집정원에 적격자만으로도 10배를 넘엇고 혈서(血書)로지원한 사람이 110명, 중등학교를졸업한사람이 192명 현직순사가 1명이잇고 다시 각도별로 보면 지원자총수로는 함경남도(咸南)의 10,901명이 가장 만코적 격자수로는 전라남도(全南)의 4,638명이 만타. 이들 지원자를 가지고 오는 4월에 각도에서 전형시험을 본 후에 5월에는 군부(軍部)에서 증병제에 의한 신체검사등을 실시하고 합격자를 발표하야 7월에 제1회로 1,000명을 지원자훈련소에 입소시켜서 4개월간 훈련을 하기로 되엇다. 남어지 2,000명도 순차로 4개월식 훈련을 마친 후에 입영시키게 될터인데 제1회 지원자 12,000명에 비해 79,000명으로 일약26배로 증가된것은 성적이너무 조타는것보다도 조선인 청년간에 얼마나 지원병될열성이 불타고잇는것을 알수잇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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